「애틋한 섬, 서해 최북단 백령도」  -배양지 님-


‘주민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지금 즉시 주민대피소로 대피하여 주십시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에엥...’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리더니 주민대피방송이 나온다. 여기는 서해 최북단 백령도다. 이제 돌이 지나 걸음마를 시작한 17개월 아들과 여름휴가차 신랑을 보러 백령도에 들어온 지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안이 벙벙하다.

대전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콜택시를 타고 아기짐을 등과 어깨에 메고 KTX 첫차를 타고 인천항에 도착해 배를 타고 총 8시간이 넘는 긴 여정 끝에 백령도에 도착했건만 지금 눈앞엔 말도 못하는 아들이 사이렌 소리에 놀라 울고 있다.

신랑은 우리를 숙소에 데려다 주며 퇴근하면 곧장 오겠다면서, 피곤할테니 한숨 자고 있으라며, 미소를 지으며 다시 부대에 들어갔는데 연락도 안된다. 처음 맞는 이 대피 상황에 아들과 난 둘 다 긴장된 마음에 가슴이 쿵쾅거린다.

갑자기 핸드폰이 울린다. 신랑인가 하는 생각에 단숨에 전화를 받는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엄마다. 엄마가 “괜찮니?”하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어본다. ‘무슨 일이지?’ 난 속으로 생각하며 엄마한테 말한다. “엄마, 여기 좀 이상하다. 사이렌이 울리네. 무슨 대피방송이 나오는데...” 아들과 낮잠을 자던 나는 이제야 엄마의 연락을 받고 인터넷 기사를 검색한다.

‘북한 지뢰도발, 대북확성기 방송, 비상’여러 가지 검색어가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엄마의 목소리가 다시 차분해진다. “민준이랑 놀래지말고, 괜찮을 테니 편한 마음으로 있어. 긴장하지 말고.” 엄마가 말했다.

그렇지, 나도 엄마다. 지금 내 눈앞엔 아들 민준이가 동그란 까만 눈동자를 깜박이며 서 있다. “그래, 아들 괜찮아.” 난 민준이를 꽉 껴안아주었다.

신랑 없이 아들과 함께 지낸지 벌써 1년 반이 흘렀다. 혼자 젖먹이 아들 키우며 직장까지 다니기 힘들다고 신랑한테 하소연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이젠 제법 말도 알아듣고 애교도 부리는 아들이 내 곁에서 힘이 되어주고 있다.

사실 우리 세 식구는 다 같이 백령도에 들어가 살 계획이었다. 그런데 아들 민준이가 태어나자마자 대학병원에 2주 가량 입원을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우리는 주말부부도 월말부부도 아닌 분기부부가 되어 버렸다.

신혼생활이 채 1년도 안된 2014년 4월, 아들이 태어난 지 보름도 되지 않을 무렵에 신랑은 백령도로 전출 명령이 났다. 아직 목도 못 가누는 아기를 데리고 섬 생활은 무리라는 어른들의 반대로 우리는 이렇게 아직도 신혼의 향기가 채 가시지 않은 애틋한 분기부부다.

출산 후 우울증과 육아 스트레스로 신랑에게 전화해 울면서 하소연을 하고 그때마다 나에게 미안하다, 힘내라, 사랑한다며 힘이 되어주던 신랑과 꼭 닮은 아들이 지금 백령도에 나와 같이 있는 것이다.

다시 핸드폰이 울린다. 신랑이다. 너무 반가워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남편” 하고 전화를 받으니 신랑이 따뜻한 목소리로 말한다. “놀래지 말고, 방송 들었어요?”물어본다. 나는 울먹이며 대답한다. “네, 근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모르겠는데...”신랑이 다시 말한다. “괜찮으니깐 베란다로 나가보면 대피소 보이죠? 민준이 먹을거랑 여벌옷이랑 담요 같은 것 챙겨서 대피소에 가 있어요. 무서워하지 말구요. 그리고 나 오늘 퇴근 못할 수도 있으니깐 걱정하지 말고, 울지 말아요. 밥 챙겨먹고, 알겠죠?” “네...”울먹이며 대답한다.

전화를 끊고 정신을 차린다. 여벌옷이랑 담요라, 아직 짐을 채 풀지도 않았는데 다시 짐을 챙겨야 한다니 당황스럽다. 아들 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간식도 챙기고 물도 챙기고 빠진 것이 없나 다시 한 번 살피고, 그런데 아무래도 입 짧은 아들이 낯선 환경에 가면 더 안 먹을 것 같다.

밥을 먹여가야지 하는 생각에 부랴부랴 밥을 먹인다. 다행히 잘 먹어준다. 매일 밥 먹이는 것이 전쟁 아닌 전쟁이었는데 본인도 무엇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인지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다. 고마운 것, 효자아들이다. 대피소 입구에는 군인삼촌들이 있다.

다행히 낯을 가리지 않는 아들 덕분에 돌아다니기는 편하다. 우리 아들 군복 입은 군인삼촌들만 보면 아빠인줄 알고 활짝 웃는다. 역시나 대피소 입구 군인삼촌들에게도 활짝 웃는다. 이렇게 2015년 8월 20일 우리의 백령도에서의 여름휴가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째깍째깍... 시계는 밤 12시를 넘어 이제 21일이다. 다행히 저녁에 비상대피가 해제되어 잠은 숙소에서 잘 수 있었다. 아들도 피곤했는지 내 옆에서 쌔근쌔근 잘 자고 있다. 다행이다. 그런데 난 잠이 안 온다.

결국 신랑은 못 들어온다고 한다. 원래도 겁이 많은 나인데, 무섭다. 아들이라도 없었으면 눈이 팅팅 붓도록 울고 있었을 텐데, 신랑 닮은 아들을 보며 이렇게 밤을 지새우고 있다.

둘째 날, 백령도의 아침이 밝아온다. 어제의 비상대피 상황이 무색하리만큼 지금은 고요하다. 바깥엔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고 정적만 흐른다.

또 다시 사이렌이 울린다. 비상대피가 예정되어 있으니 미리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예고 방송이다. 다시 심장이 쿵쾅거린다. 백령도에서 이틀째, 아들과 난 또 이렇게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다. 핸드폰이 난리다. 전화에, 문자에, 이 비상상황에 괜찮냐는 안부연락들이다. 그런데 사람 심리가 그렇지 않던가. 괜찮은 것 같다가도 막상 여기저기서 걱정을 해주니 또 다시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그러나 다시 정신을 차린다. 난 엄마고 군인의 아내이다. 혼자 직장도 다니고 아들도 잘 키우고 있지 않는가. ‘백령도에서 잘 지내다 가자. 비상상황은 곧 끝날거야. 오늘은 남편도 퇴근할 수 있을거야.’속삭이며 다시 마음을 다 잡아본다.

아들과 아침을 챙겨먹고 백령도 산책에 나섰다. 신랑을 보지는 못하지만 걸어서 갈 수 있는 신랑의 부대 앞을 괜히 아들과 함께 서성이며 거닐어 본다. 부대 입구 앞에 군인 삼촌들을 보니 또 다시 가슴이 먹먹해진다. 전쟁터에 신랑을 보낸 아내의 기분이 이런 마음일까? 눈앞의 부대 안에 남편이 있는데, 남편 보러 아들과 함께 이 먼 곳에 반나절이 걸려 왔건만 남편은 보지도 못하고 전쟁터에 보낸 것 마냥 걱정이 한가득이다. 그렇게 부대 앞을 서성이며 둘째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백령도에서 조금은 심심해 보이는 아들을 데리고 근처 놀이방에 갔다. 아이들과 엄마들이 제법 있다. 다들 군인가족이다. 이런 비상상황에 나처럼 당황한 듯 보이진 않는다. ‘난 역시 아직 애송이 군인 아내구나. 신랑 곁에서 든든한 군인가족이 되어 주려면 나 또한 강해져야 겠구나.’ 생각하며 또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나 난 이곳의 아이들과 엄마들이 부럽다. 다들 그들만의 애환과 삶의 고충이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빠와 함께 지내는 그들이 나에겐 가장 부러운 존재들이다. 그렇게 가슴 먹먹한 기분은 한편에 두고 아들과 놀이방에서 놀아주고 다시 숙소에 돌아왔다. 또 다시 비상대피소에 대피하란다. 첫날보단 익숙하게 짐을 챙기고 대피준비를 한다. 이렇게 점점 우리도 단단해지는구나.

아들과 나는 그렇게 백령도에서 군인아빠와 함께 군인가족으로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오늘도 혹시나 하는 내 바람은 무산되고 신랑은 퇴근을 못한다고 한다. 그렇게 또 아들과 둘이서 백령도에서 둘째 날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셋째 날 아침부터 신랑과 엄마가 번갈아가며 전화가 온다. 상황이 더 긴박해진 듯하다. 뉴스 기사에는 오후 5시가 고비라고 하며, 엄마는 빨리 배표를 구해 나오라 하시고 신랑도 아무래도 금방 종료될 것 같지 않다며 본인도 없는데 민준이랑 둘이 있는 것이 더 걱정된다며 배표를 변경해 줄 테니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우리 세 식구의 5박6일 백령도의 여름휴가 일정은 이렇게 무산되고 있었다. 눈물이 왈칵 나온다.

17개월 아들과 백령도에 들어온 지 3일째, 많은 추억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바램이 가득했건만 현실은 3일 동안 신랑 얼굴은 채 한 시간도 보지 못했다. 그런 나를 위로하듯 신랑이 핸드폰 너머로 말한다.

“부인, 작년 10월에 기억나요? 그때도 민준이랑 백령도 들어왔을 때 나 비상대기 걸렸었는데, 사무실에서 부대원들이 부인이랑 민준이 백령도에만 들어오면 비상대기 걸린다고 이제 오지 말래요. 하하하.”

맞다. 작년 10월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땐 6개월 밖에 안 된 젖먹이 아들을 데리고 백령도에 왔었다.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뒤로한 채 수유실도 없는 배안에서 답답하고 배고파 우는 아들을 달래며 화장실에서 젖을 먹이며 힘들게 백령도에 들어 왔었는데 그때도 비상대기로 인해 신랑이 퇴근을 못했었다.

그래도 그때는 하루만 비상대기였는데, 사람은 좋은 기억만 간직하는 것일까? 내 머릿속엔 신랑이 비상대기로 우리와 함께 하지 못했던 하룻밤은 기억하지 못하고 나머지 함께 보냈던 행복했던 기억들만 남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맞아, 작년에도 그랬었네.’피식 웃음이 난다.

상황이 더 긴박하게 흘러가 결국 민준이와 나는 신랑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백령도에서 3일째, 다시 육지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다시 짐을 챙긴다. 신랑과 사진 한 번 못 찍고 따뜻한 밥 한 번 해먹이지 못하고 다시 육지로 나가야 한다. 목이 메여온다.

왠지 모를 억울함과 속상한 마음에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오후배로 다시 백령도를 나가야 한다. ‘신랑 얼굴을 한 번만 더 보고 나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간절히 마음속으로 바래본다.

신랑의 전화가 온다. 아무래도 나가기 힘들 것 같다며 콜택시를 불러서 배 타러 가야 할 것 같다고 나지막이 말한다. ‘그래, 우리 남편은 군인이지. 여기 최북단, 전방 백령도고...’

남편의 방에서 남편의 옷가지와 물건들을 정리해주고 우리의 짐도 다시 챙기고 그렇게 백령도를 떠날 준비가 끝났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대로 나가기는 너무 아쉽다. 무작정 민준이와 부대 입구 앞으로 걸어갔다.

신랑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신랑이 전화를 받는다. “남편, 나 부대 앞인데, 얼굴 잠깐만 보고 가면 안될려나? 흑흑...” 또 바보같이 눈물이 터졌다. “어? 왔다고요? 잠깐만요.” 결국 신랑이 당황한 듯 부대 앞으로 나왔다. 저 멀리서 전투복에 철모에 방탄조끼까지 입은 신랑이 보인다. 처음 본 방탄조끼를 입은 모습에 가슴이 미어진다.

그 조끼에 총알이 박힌 것 마냥 내 가슴이 아파온다. 또 다시 내 남편이 군인이구나 실감을 한다. 민준이도 아빠 얼굴을 본 듯하다. 작은 얼굴에 미소를 한가득 머금고는 아빠를 보고 웃는다. 이렇게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나가게 되니 참 다행이다. “남편, 밥 잘 챙겨먹고, 너무 무리하지 말고요. 흑흑...” 무슨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 펑펑 우는 나와 신랑은 그렇게 백령도에서의 작별인사를 했다. “응, 난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 부인이랑 민준이가 걱정이지. 힘들게 백령도에 들어 왔는데 고생만 하다 나가네요. 미안해요... 에휴, 또 배타고 나가려면 또 고생이네요.” 며칠 동안 잘 못자고 그래서 그런지 신랑의 얼굴이 까칠하다.

그래도 아들과 날 바라보며 활짝 웃어준다. 이런 신랑을 남겨두고 나와 민준이만 살겠다고 나가는 것 같아 마음이 너무 무겁다. 이렇게 우리 세 식구 눈에서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지만 얼굴엔 미소를 지으며 아쉬움을 남긴 채 백령도를 떠났다.

돌아오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혹시 모를 비상상황에 대비하여 배는 안전항로로 우회하여 가는 덕분에 다섯 시간 가까이나 배를 타야 했고 높은 파도에 심한 배멀미로 나는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들 민준이가 별로 보채지도 않고 배멀미도 오히려 나보다 안하고 잘 동행해 주었다. 역시 군인의 아들답다. 괜히 아들을 보고 있자니 든든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우여곡절 많았던 우리의 백령도 생활이 마무리되었다. 긴박했던 상황은 다행히 종료가 되었고, 지금 우리는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 있다.

그곳 백령도는 주민 비상대기로 그렇게 긴박했는데 이곳 육지는 평온하다. 남편이 입었던 방탄조끼가 아직 가슴 시리도록 마음 한구석에서 아파오지만 그런 신랑과 그의 동료들, 대한민국 군인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마음 편히 생활할 수 있는 것이리라.

군인가족이 아닌 사람은 모를 것이다. 북한의 행동 하나하나에 가슴 졸이며 비상대기에 속앓이 하는 군인가족들의 애환을...

이렇게 또 한 번의 훈련과 백령도에서의 에피소드로 우리도 점점 더 군인가족으로 성큼 다가간다. 이렇게 나랑 민준이도 군인가족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 것이다.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이 말, 이 글을 빌어 말해본다.

남편 고마워요!

민준 아빠, 당신이 군인이라 자랑스럽고 나 또한 군인의 아내라 행복합니다!



    「자소서(자기소개서)」   -조예진 님-


저는 이화여고 3학년입니다. 20년이 넘게 현역장교로 근무하시는 아버지와 어머니, 부부군인 두 분의 영향을 많이 받아,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6번의 전학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때는 부모님의 영향이 아닌 제 스스로 결정해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기숙사 생활을 통해 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싶어서 한성여고에서 이화여고로 전학했습니다.

수시원서를 쓰면서 자소서를 정리하다 보니, 어릴 때부터 전국을 유람(?)했던 추억이 떠올라서, 군인자녀의 즐거움과 어려움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예능 프로그램 진짜사나이에서, 특히 이기자부대 편은 거의 몰입해서 봤습니다.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 화면 속 풍경은 너무나 익숙했지요. 아빠가 당직하시는 주말이면 김밥이랑 간식을 갖고 가서, 부대 마당에서 공 차는 삼촌들 틈에서 놀았답니다.

전투복 어깨에 빨간 마크에 선명하게 붙어 있는 세 글자 ‘이기자’. 탤런트 류수영 씨가 거꾸로 하면 ‘자기이?’해서 하트 웃음을 터뜨렸지만, 강도 높게 잠을 안자고 훈련하던 독도법 코스, 산아래 계곡은 생각만으로도 그 바람의 느낌이 생생 합니다.

화악산 촛대바위와 화악터널 아래는 특히 펜션도 많고, 토마토 농장도 있고, 차가운 계곡물이 흘러 들어오는 수영장, 꼬불꼬불 파마 머리에 앞니 두 개가 빠져서 옥수수를 옆으로 갉아먹는 귀여운 꼬마 사진을 보면, 오리 튜브 위에서 아빠 목을 꼭 붙들고 있네요.

여름마다 할머니 생신 때는 큰아빠 큰엄마, 고모네 식구들도 오셔서 계곡에서 캠핑도 하고, 관사 텃밭에서 키운 고추랑 상추도 땄었지요. 여름 저녁 해가 지기 전, 산기슭에 약간의 노을이 걸리는 시간에, 동생이랑 누가 잘하나 하고 서로 물뿌리개통에 든 물을 안 흘리고 옮기려고 낑낑대면 할머니는 ‘우리 강아지들 잘한다’그러셨어요.

비오는 날이면 졸졸졸 놀이터 둘레 배수로에 맑은 물이 흐르고, 초록색으로 알록달록 배가 빨간 개구리가 많았습니다. 우리는 이 비단개구리를 ‘이기자 개구리’로 불렀답니다. 눈치채셨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돌 여가수들이 어려워하는 ‘다, 까, ?입니다’는 제겐 너무나 친근한 생활용어랍니다.

초등학교 1학년은 간호장교인 엄마를 따라서 광주광역시에서 살았습니다. 할머니와 동생과 저는 엄마랑 같이 광주에서 살고, 아빠만 강원도 화천에 남았지요. 이사가기 전에 지도를 펼쳐놓고 아빠가 길을 설명해주셨어요. 춘천, 청주, 대전 지나서 광주로 주욱 연결된 고속도로는 신기하고 신났는데, 이삿짐 차가 짐을 실을 때는 비가 부슬부슬 오고 슬펐습니다.

그래도 어른들이 바쁜 틈을 타서, 동생이랑 둘이서, 엄마 몰래 거실 벽에 걸려있던 ‘사랑의 매’를 쓰레기장에 갖다 버렸어요. 한 살 차이나는 동생이랑 아침에 눈떠서 잠자는 이불 속에서까지 토닥토닥 많이 싸웠는데, 엄마는 가끔 ‘매매할까? 호랑이한테 갈까?’하고 겁주셨거든요.

밤에 창밖으로 보면 깜깜한 산에 호랑이가 사는 것 같아 무서운데, 사랑의 매가 벽에 떡 걸려 있으니, 동생이 미울 때도 마음껏 꼬집지 못하니까, 큰 도시로 가면 호랑이는 못 따라 올테니 가느다란 회초리 사랑의 매만 버리면 신났겠지요. 동생과 사이좋게 우산을 쓰고 사랑의 매를 버릴 때는 둘이 한 팀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엄마 부대에는 커다란 밤나무가 있어서, 토실토실한 밤을 주워서 삶아 먹고, 오래된 소나무 위에 다람쥐도 있었어요. ‘어라, 화천에서 우리를 따라왔나’하고 신기했지요. 휴가 때 아빠가 오시면 온가족이 놀러 다녔습니다.

보성 녹차밭, 광양 매화축제, 목포 해양사 박물관, 함평 나비축제... ‘정든 곳을 떠나서 이사하기 섭섭하겠지만, 우리는 전국을 여행하면서 생활하는 가족’이라고 아빠가 그러셨는데, 정말로 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일년이 좀 못되어 아빠가 상무대로 오셔서 온 가족이 모여 살게 되어, 저는 1학년 입학해서 막 친구들과 친해졌는데 전학을 가야 했지요.

다행히 상무대 아파트에는 친구들이 많았고, 동네 이름도 똑같이 ‘사창리(社倉里)’였어요. ‘사창’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춘궁기에 곡식을 대여해 주었다가 추수가 끝나면 회수하던 사창제도에서 유래되었고, 전국에 사창이라는 지명을 쓰는 곳은 9개나 있다고 하네요.

우리 아빠는 가는 곳마다 역사와 유래와 명소를 설명해 주시는 좋은 잔소리쟁이세요. 아빠는 또 대전, 서울로 부대를 옮겨 다니시더니 경기도 철원으로, 엄마와 나와 동생은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할머니는 몸이 아프셔서 시골 큰집으로 가시구요. 에버랜드 연 회원권을 사서 매일매일 놀이공원에 갈 수 있다고 엄마가 꼬셨지만, 초등학고 5학년 예비 사춘기인 저는 세 번째 전학이 너무 싫었습니다.

더구나 수업 내용도, 진도도 달라지는 학교생활과 친구들 사귀기는 참 어려웠습니다. 평일날 사람이 거의 없는 에버랜드를 뛰어 다니며 동생과 둘이 놀이기구를 다 누볐지만, 뱅뱅 도는 롤러코스터처럼 제 마음도 오르락내리락 갈피를 잡기 힘들었습니다.

엄마가 일찍 퇴근해서 공부를 챙겨 주면, 잔소리가 듣기 싫었고, 늦게 야근하는 날엔 ‘치킨 배달시켜 줄게, 동생이랑 먹고 있어’그러면 냉장고에 쿠폰을 모아 붙이면서 ‘밥도 안 챙겨주는 나쁜 엄마’로 야속해 했습니다.

거의 일년동안 그렇게 서로 힘들게 힘겨루기 하며 지내다가, 엄마가 아빠 부대 가까운 곳으로 이사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던 날, 저는 배가 많이 아팠어요.

낮부터 살살 아파왔는데, 엄마는 전화로만 ‘찬 것 너무 많이 먹었나보다, 매실 한 잔 먹고 있어봐’그러고는 밤늦게 퇴근하셨습니다. ‘오른쪽 아래가 더 아프고, 누를 때도 아픈데, 눌렀다가 땔 때는 정말 아파요’ 그랬더니, 엄마는 ‘애가 메디컬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구나’ 그러시면서도 제가 누웠다가 일어날 때 허리도 아프고 거의 다리를 펴지 못하니까 응급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피검사를 하고, CT도 찍고,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외과 선생님이 제 맹장에 염증이 생겨서 통통하게 부은 사진을 설명해 주면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 내 배에 구멍이 생기겠구나’갑자기 옆에 있던, 열나서 울던 아가처럼 저도 막 울고 싶어졌는데, 글쎄 엄마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먼저 우시는 거예요.

수술 간호장교라 무서운 게 없는 우리 엄마가 ‘미안하다’면서 펑펑 우니까, ‘괜찮아요’그렇게 대답하면서 속으로는 ‘거봐라, 내가 아까 낮에부터 아프다고 했잖아요’하고 티 안나게 반항했습니다.

저는 아주 많이 아픈데도 꾹 참고, 큰 주사를 잘 맞아서 수술을 했고, 급하게 외할머니가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오셨고, 엄마는 출근을 했습니다.

우리 엄마는 정말 독합니다. 구멍 자리가 3개나 있어서 아주 오래오래 입원해 있고 싶은 저를, 바로 퇴원시켜서 이삿짐을 싣고 경기도 포천으로 갔으니까요. 아빠는 병문안도 안오시고, 어른들은 맹장수술이 얼마나 무섭고 크고 중요한 수술인지 몰라줍니다.

포천 일동에서 철원으로, 주말마다 아빠 집으로 갔습니다. 한 시간 정도 거리이니, 주중에 한 번씩 오겠다던 아빠는 주말에도 부대에만 계셔서, 엄마랑 동생이랑 제가 자등고개를 넘어서 아빠를 만나러 갔었지요.

청색 바탕에 하얀색의 백골모양의 마크가 처음엔 무섭게도 보였는데, 아빠가 그 뜻을 설명해 주시길, 죽을 각오로 싸우면 반드시 산다는 필사즉생(必死卽生)의 정신이라고 하며, 죽을 수는 있어도 패할 수는 없다는 정신으로 1950년 10월 1일날 3.8선을 가장 먼저 돌파했다고 합니다.

우리 아빠만 역사와 유래, 명소를 설명해 주시는 잔소리쟁이인 줄 알았는데, 백골성당에서는 신부님도 주일 미사 때 백골정신을 강론하시니, 정들었던 철원을 떠날 때는 불굴의 백골상도 웃는 표정으로 느껴진다고 합니다.

저는 솔직히 웃는건지 우는건지 표정이 애매한 커다란 백골 상징탑 아래에서 사진 찍을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엄마 성화에 못이겨 김치?하고 기념촬영하고, 새로 맞춘 중학교 교복을 일학년만 입고, 엄마를 따라서 다시 대전으로 전학을 갔습니다.

대전 자운대는 조용하고, 넓고, 또 예전에 장성 사창 초등학교때 친구 두 명을 다시 만나서, 좀 마음에 들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주민등록등본을 보시면서 조심스럽게 ‘엄마랑 동생이랑 셋이서만 사니?’하고 물으셔서, ‘네’하고 대답했는데, 나중에 선생님이 학부형 상담 때, ‘예진이가 많이 의지가 되시지요?’하고 얘기하셔서, 엄마가 웃으시면서 아빠는 철원에 계시다고 했답니다.

새벽에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오거나, 가끔은 생도 언니들이랑 일주일씩 훈련가는 엄마와 멀리 있는 아빠로, 중학생인 동생과 저는 소년소녀 가장처럼 스스로 밥 챙겨먹고 학교가서, 담임선생님이 많이 안쓰러워하셨습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 아파트단지에 서는 화요장터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빵과 두부도 사고, 단골 과일가게 아주머니가 덤으로 주시는 사과도 받으며, 동생은 설거지도 하고, 저희는 씩씩하게 살림을 잘 했습니다.

그런데 올 봄에, 정확히 2015년 6월 8일에 엄마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나쁜 엄마가 고3인 저와 고2인 남동생만 남겨두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중학교를 3번 옮기면서도, 전방으로 갈 것 같은 엄마 때문에 고1 때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또 전학을 하면서도 저는 웃으면서 잘 하는 착한 딸인데, 엄마는 ‘외할머니가 곧 오실거야, 2주간 간호사관학교로 훈련간다’는 문자만 남기고 연락이 안되는 거예요.

나는 고3 수험생인데, 6월 모의평가 성적으로 담임선생님과 학부모 상담도 잡혀 있는데, 며칠간 전화도 문자도 안되던 엄마가, TV 뉴스에 스쳐 지나갔습니다. ‘메르스 군 의료지원단 대청병원 지원’이런 자막이 나오면서요.

스물 네 명의 얼굴이 모두 비춰지진 않았지만, 잠깐 스쳐간 저 군복 입은 뒷모습은 분명 우리 엄마가 맞습니다. 부산에 계신 아빠께 전화를 했더니, ‘엄마가 너 걱정할까봐 다 얘기 못하고 급하게 부대이모들과 파견 갔다’하는데, 눈물이 줄줄 났습니다.

학교에서는 열체크, 손씻기하고 기침예절 교육하고 마스크 쓰라고 챙겨주는데, 우리 엄마는 나한테 말도 안하고 위험한 메르스 병원으로 가버리다니 섭섭하고 걱정되고 불안해서 공부가 잘 안되는 거예요.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자 남들이 꺼려하는 힘든 일을 하고 있잖니’하는 외할머니 말씀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통화가 되어, ‘걱정말고 열공 즐공하고 있어라. 이모들 챙겨주고 안전하게 잘 있다 갈게. 미안.’하는 엄마에게 ‘엄마가 챙겨야 하는 아이는 나랑 동생이란 말이예요’하고 속으로만 말했습니다.

마치 누에고치처럼 온통 하얀 방호복을 입고 있는 엄마 사진을 보니, 떼쓰기가 미안했어요. 다행히 엄마는 3주가 지나고 무사히 부대 이모들과 원래 자리로 돌아왔고, 그 사이 아빠는 상무대로 또 옮기셨습니다.

요즘은 KTX를 타고, 한 주는 엄마가 또 한 주는 동생과 제가 번갈아서 아빠를 만나러 갑니다. 냉동실에 작게 포장된 곰탕과 1인분으로 얼린 불고기와 멸치볶음과 가끔은 시금치무침, 아빠가 좋아하는 향 좋은 커피 한 봉지를 담은 아이스 가방도 함께요.

아빠 말씀대로 전국을 여행하면서 생활하는 가족이라, 기차여행 하는 기분으로 서울과 전라남도 장성을 오갑니다. 초등학교 때 생활하던 상무대 아파트는 다시 가보니, 놀이터도 상가도 모두 그대로인데, 나무들이 많이 자란게 느껴졌습니다. 이젠 전국구 여행을 완성하고 복습으로 들어갔네요. 그사이 저도 많이 자랐겠지요?

저는 세상 어디를 가도 말이 통하는 가장 큰 조건은 ‘진심’이라는 것을 생활 속에서 경험으로 배웠습니다.

우리반에 미국에서 온 교환학생이 있었는데, 낯선 환경에서 어떤 도움과 배려가 필요한지, 저는 그간의 이사경험으로 눈빛만 봐도 그 친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봉사활동 참여도 함께하고, 가족과 한국 정서에 대해 많이 이야기 나누며, 언어가 다른게 소통의 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친구와의 생활로 깨달았습니다. 또 이화학사 기숙사에서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친구가 눈에 띄면, 자연스럽게 기회를 만들고, 룸메이트들과 갈등이 생겼을 때는 자존심을 세우기보다는, 먼저 대화를 시작하여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나의 감정과 상대방의 생각을 공감할 수 있는 소통의 힘을 키울 수 있는 것은 군인가족 생활 여정이 제게 준 소중한 재산입니다.

인생은 여행이라는 아빠 말씀을 새깁니다. 살면서 가끔은 어떤 동네는 지명을 나직이 불러 보는 것만으로도 특별해집니다.

그 시간과 공간 속에 ‘내’가 ‘더불어’있었기 때문이라고 엄마는 말씀하세요. 어릴 때 이사가며, ‘사창리야, 잘 있어라. 그동안 고마웠다’하며 떠났던 것처럼, 오늘 다시 인사합니다. ‘사창리야, 반가워 오랜만이다. 잘 부탁해’ 엄마 아빠 사랑해요.



    「군인은 가족도 강인해야 한다(출산수기)」   -이서현 님-


2011년 겨울, 존경하던 어르신께서 주선하신 맞선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서, ‘나가서 차 한 잔만 하고 들어와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나갔던 그 자리가 내 인생의 2막을 여는 자리임을 그땐 알지 못했다. 첫 만남 이후 우리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도 빠르게 결혼이 진행되어졌고, 관사 신청으로 인해 결혼식 5개월 전, 그러니까 첫 만남 이후 6개월 만에 혼인신고를 하고 부부가 되었다.

오빠도 남동생도 없는 나에게 군대, 군인, 군인가족이라 함은 미지의 세계와도 같은 것이었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기에 더 겁 없이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군인가족이 이렇게 잦은 이사를 하는지, 이렇게 외로운 것인지 누군가에게라도 들어 알았더라면 나는 이 결혼을 망설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살던 고층빌딩이 즐비하고 밤늦도록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도시를 떠나 논과 밭이 보이고, 저녁 8시면 고요해지는 농촌드라마 ‘전원일기’속 시골생활은 답답하고 무료하고 불편하기만 했다.

남편 하나 바라보며 내 직장도 그만두고 가족도, 친구들도 없는 타지에 와서 새벽 6시에 일어나 출근해서 저녁 늦게야 퇴근하고 집에 오는 남편을 기다리는 것이 내 일상의 전부였다. 그렇게 돌아와 저녁 먹고 잠들었다가도 새벽 2시든 4시든, 더욱이 천둥, 번개 치는 날이나 추위가 매서운 날엔 고장난 CCTV를 고치러 또 다시 나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보아야 했고, 남편이 당직근무 서느라 집에 안 들어오는 날에는 탕!탕!탕!탕! 울리는 무섭기만 한 야간 사격 총소리를 들어가며 혼자서 오지 않는 잠을 청하다 날을 새곤 했다.

혼인신고 후 결혼식까지 관사에서 함께 살던 3개월은 내가 군인가족이 되기 위한 적응기간이었고 그 과정에서 나는 밤새 혼자 울기도 많이했다. 나는 너무나 외로웠고 가족도, 친구들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생활에도 점차 익숙해져 가서 혼자 있는 시간을 나름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이웃들도 사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 우리는 또 한 번의 이사를 했고 새로운 곳에서 결혼 1년 만에 우리가 기다리던 아기를 갖게 되었다.

임신기간 동안 나는 늦은 시간에 뭔가가 먹고 싶어도 먹고 싶다고 남편에게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가게들도 일찍 문을 닫고 마트도 먼 이 시골에서 먹고 싶은 것을 구해오는 일을 불가능했고,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멀리까지 나가야 하기에 많은 시간을 소요해야 했는데 자는 시간도 부족한 남편에게 그것을 부탁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산부인과에 다니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다. 집에서 1시간 거리인 산부인과를 가기 위해서는 차가 필요했고 나는 운전이 미숙해서 남편이 항상 동행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남편이 당직근무를 선 다음날 점심시간 이후에 퇴근을 하고 병원을 가야 했다. 당직근무 서느라 밤새 한숨도 못잔 남편 눈에는 잠이 가득한데 졸린 눈을 꿈뻑꿈뻑 거려가며 운전을 하는 그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사실 위험하기도 했다. 딱 한 번, 남편이 서울로 교육가서 나 혼자 병원에 가야 했던 날이 있었는데 버스를 2번씩 갈아타면서 가야 해서 왕복 4시간이 걸렸다. 남편이 훈련 중에 아기를 낳았다는 군인가족들 이야기도 들었고, 유도분만을 해서 남편이 있는 기간에 맞춰 미리 낳았다는 군인가족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나도 어쩌면 남편이 없는 기간에 아기를 낳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첫 출산의 공포와 두려움 속에 제발 남편이 곁에 있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결국 남편은 출산예정일을 열흘가량 남겨두고 훈련을 가게 되었고 그래도 가까운 곳에서 훈련하는 거니 혹시나 아기를 낳는다면 바로 올 수 있다는 말로 나를 안심시키고 훈련을 떠났다. 남편이 훈련 가고 없는 사이 나는 이틀 동안 가진통을 겪었다. 진진통과 가진통을 구별할 수 없었기에 스마트폰으로 여러 가지 출산 관련 정보 검색도 해보고 수시로 시간체크를 해가며 불안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4월 29일 밤 10시 진통주기가 10분 간격으로 맞춰지고 있었고 ‘이것이 진통이구나.’라고 느꼈다. 진통하느라 음식을 해 먹기도 힘들었던 그때, 그래도 배가 고프면 아기 낳을 때 힘을 못줄 것 같다는 생각에 그 밤에 혼자 치킨을 먹으며 힘을 비축하고 출산가방을 재정비하고 샤워를 하고, 밤새도록 진통시간을 체크했다.

어느 덧 날이 조금씩 밝고 있었고 새벽 5시 6~7분 간격으로 진통이 줄어 남편에게 연락을 했다. 과장님께 보고 드리고 집으로 오겠다던 남편은 1시간 후에 다시 전화를 해서 곧 회의가 있으니 보고사항 보고 드리고 나서 출발하겠다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고, 1시간 뒤 다시 전화가 와서 조금 늦을 것 같으니 119 구급차를 불러 먼저 병원에 가 있으라고 했다.

진통이 5분 간격이 되자 아기가 곧 나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나는 남편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119에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제가 곧 아기를 낳을 것 같아서요. 병원에 좀 데려다 주세요.”라고 시작한 나의 통화는 “오실 때 사이렌은 꼭 끄고 와주세요.”로 끝났다. 이 작은 시골마을 관사에서 사이렌 울리며 구급차가 오면 시선이 집중될 게 뻔했고 아침부터 요란스러운 소동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구급차는 다른 마을에서부터 오기 때문에 15분에서 2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했고 나는 출산가방을 들고 관사에서 조금 더 걸어 나와 구급차를 기다리며 이웃들의 시선을 피했다. 구급차가 왔고, 생전 처음 타 본 구급차 안을 둘러보며 신기해하던 내게 구급대원은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나는 그 물음에 대답하면서 시계를 보며 진통시간 체크를 했다. 출근길이라 막히는 구간에선 중간중간 사이렌을 켜고 달려 40분 만에 병원에 도착하였다.

구급대원께서는 친절하게 내 짐가방을 들어다주시곤 병원 측에 인수인계 사인을 받고 순산하라는 응원의 말을 내게 전하고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난 혼자 분만실에 들어가 남편을 기다리며 진통을 겪어야했다.

9시에 온다던 남편은 11시, 12시로 자꾸 시간이 미루어졌고, 간호사들은 들어올 때마다 보호자는 언제 오시냐며 물었다. 친정도, 시댁도 3시간 거리에 있었고 친정어머니는 일을 하시기 때문에 오시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리고 언제 아기가 나올지 모르는데 긴 시간동안 무작정 기다리시려면 초조해하실 게 뻔했기 때문에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출산하러 병원에 왔다는 사실을 나는 아무에게도 전하지 않았다.

그렇게 남편만을 기다렸지만 남편은 결국 점심시간이 지나서도 오지 못했고 또 1시, 3시... 자꾸만 온다는 시간은 미루어졌다. 나는 남편을 보내주지 않는 과장님이 너무나 야속했다. 과장님도 자녀분들이 있으니까 이런 상황 다 겪어 보셨을 텐데, 왜 남편을 안 보내 주시는 건지... 그래도 남편에게 화를 낼 수도 불평을 할 수도 없었던 건 나를 이 병원에 혼자 보내두고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을지, 본인은 얼마나 오고 싶을지, 보내주시지 않는 상관이 얼마나 원망스러울지 그 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남들은 소리 지르고 팔딱팔딱 뛰기도 한다는 그 진통을 나는 오롯이 바르게 앉아서 입술을 꾹 깨물고 눈을 꼭 감은 채 ‘하나, 둘, 셋, 넷 ... 마흔’이렇게 숫자를 세어가며 ‘40초만 아프면 또 잠시 괜찮아.’라는 생각으로 참아냈다. 무통주사를 놓아주기 위해 오신 마취과 의사선생님께서 간호사를 보고 “이 산모 진통 안하는가 본데?”라고 말씀 하셔서 간호사가 “지금 2분 간격으로 진통하고 계신 거예요.”라고 이야기할 만큼 나는 정말 아픈 티 내지 않고 참았다.

남편이 옆에 있었더라면 아프다고 더 엄살 부리고 무섭다고, 손 잡아줘, 등 쓰다듬어줘 보챘을지도 모르지만 나 홀로인 분만실엔 내 응석을 받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저 참아내야만 했다.

옆의 분만실에선 “축하드려요. 아드님이시네요.”, “축하드려요. 공주님이십니다.”라며 탄생의 기쁨을 알리는 소리가 몇 번이나 들려왔지만 나는 진행이 더디어 촉진제를 맞았는데도, 아기가 아빠를 기다리는지 도무지 나올 기미가 없었고 뱃속에서 아기가 자고 있다며 간호사가 내 배를 흔들어 아기를 깨웠다.

그리고 오후 4시가 넘은 시간, 나는 더 이상 진통을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출산이 임박해 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빠 안 오셔서 어떡해요. 서운하시겠어요... 그래도 힘내서 나랑 같이 낳아봅시다.”라고 담당의가 말했다. 그 말이 얼마나 고맙고 의지가 되던지...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는 말을 실감하며 생에 가장 큰 아픔과 고통을 느끼며 남편의 손 대신 간호사의 손을 잡고 온 힘을 다했다.

그리고 병원에 온지 9시간 만에 나는 3.02kg의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기가 이 세상에 처음 나온 그 순간, 아기의 탯줄을 잘라줄 아빠는 없었다. 고생했다고 나를 토닥이고 안아줄 남편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울지 않았다. 탯줄이 아직 잘리지 않은 아기를 품에 안고, 아빠 몫까지 더욱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남편에게도, 친정엄마에게도 아기사진과 함께 출산소식을 전했다. 하나뿐인 딸이 혼자 분만실에서 9시간을 있다가 혼자서 아기를 낳은 게 얼마나 속상하실지 알기에 친정엄마에게 더 씩씩한 척, 괜찮은 척 했다.

남편은 아무래도 본인이 출산시간에 못 맞출 것 같자, 시부모님께 연락을 드렸었고, 부랴부랴 달려오신 시부모님은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 바로 도착하셨다. 그리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남편은 내가 병실로 옮기고도 3시간이 더 지난 저녁에야 병원에 올 수 있었다. 미안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신랑을 나는 더 밝은 미소로 반겨 주었고, “군인가족들은 이런 일이 다반사래, 그래서 나 미리 각오하고 있었어. 괜찮아.”라고 도리어 내가 남편을 위로해 주어야 했다.

신생아 면회시간이 끝났지만 병원 측의 배려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아빠와 아기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고, 벅차오르는 감동과 태어나는 순간을 함께 해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아빠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후 나는 병원에서 구급차 타고 와서 혼자 아기 낳은 산모로 유명해졌고, 친한 친구들은 나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독하다고 했다.

군인과 결혼하여 군인과 살다보니 어느 새 내 안에도 군인처럼 강인하고 씩씩한 마음이 자라나고 있었나보다.

결혼 전에 감기 걸려서 병원에 갈 때도 혼자 못 간다고 엄마든, 친구들이든 끌고 진료실까지 들어가던 겁 많고 나약하던 내가, 혼자 아기를 낳고 남편이 훈련가고 없으면 1주일, 2주일도 혼자 독박육아, 전투육아를 하며 아이를 키우고, 지금은 뱃속에서 올 연말에 태어날 둘째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둘째를 출산할 때는 남편이 꼭 곁에 있어 주고 아기의 탯줄도 직접 잘라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사실 이번에도 마음은 비워둔 상태이다.

이번에 맡은 중대장이란 자리가 얼마나 바쁜지, 얼마나 부대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지 그동안 곁에서 봐와서 잘 알기 때문에...

이따금 출산할 때 남편이 옆에 있는 게 어쩌면 더 불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 때면 내가 이렇게 혼자임에 익숙해졌나 싶기도 하고, 남편이 들으면 서운해 하겠다 싶어진다.

이제는 잦은 이사가 힘들기는커녕 새로운 지역에 가면 그 지역을 구석구석 여행해야 겠다라고 생각하니 다음 근무지가 오히려 기대되고, 비록 친구들은 없지만 새로운 이웃들을 만나 인연을 맺고 같은 군인 가족이라는 유대감으로 서로에게 기댈 수 있어서 외롭지 않다.

그리고 차 많고 사람 많은 도시로 나가면 오히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이 시골이 익숙해지고 한적한 여유로움을 즐길 줄 알게 되었고,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바쁜 남편을 보며 불평불만하지 않고 나라에 내줬다 생각하고 살게 되었으며, 오히려 나라의 안보를 위해 애쓰는 남편이 자랑스러운 걸 보니 이젠 나도 진짜 군인가족이 되어 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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